우리가 살았던 곳의 기막힌 정황에 대해서 이전 포스팅에 줄줄 나열했지만 중요한 건, 이 조건들로 인해 우리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일이 피곤할 때 전기가 나가면 스트레스였고 더워 죽겠는데 샤워를 못하면 몸의 열기로 기절할 것 같았지만, 여린 생활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상황에 대해 그러했듯 우리는 생각보다 즐겁게, 잘 이겨냈다.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악조건에도 발동하는 긍정마인드의 힘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그래서 우리 숙소는 떠올리기도 싫은 곳이 아니라 반드시 다시 가야하는 곳이었다. 아니 다른 거 다 떠나서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 아닌가. 집이자 사무실이자 회의 장소이자 작업실이자 손님맞이 공간이자 통역 동생의 과외 장소이자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이자... 아무튼 다사다난했던 우리의 아지트였다.
다시 오게 된다면 꼭 우리가 살았던 그 방에 묵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번에 가지 않았던 건 우리가 떠난 뒤 상황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이고 전기고 거의 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져 후임자들이 동하로 떠났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았을 때와 비교해 크게 나빠지진 않았을 것 같긴 했지만(이미 더 나쁠래야 나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근처의 아는 다른 숙소에 예약을 했다. 그리고 바쁘게 돌아가는 여린 일정 탓에 생각을 못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어느 날 저녁 무심코 들어갔는데.
.......여기가 어디...?
꽝찌투어 때 이용했던 폐차 직전의 차량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물론 눈따위 오지 않지만) 주차되어 있던, 잠시 숙소 관리를 맡았던 아저씨들이 저녁 장사를 했던, 태우고 난 쓰레기 잔해물이 이끼와 함께 엉겨붙어 있던 숙소 마당이 깔끔하게 새로 덮여 있었다. 촌스럽기 이를 데 없는 간판도 온데간데 없고 담장의 철근과 페인트칠도 다 새로 했다. 어머, 어머, 어머, 말을 잇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이미 입구부터 우리가 아는 그곳이 아니더니 내부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동하에서나 보던 멋진 조명이 설치된 리셉션이 생겼고, 우리가 자전거를 주차하던 먼지투성이의 공간도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커텐과 식탁보가 교체되었고, 온갖 스크래치와 때가 껴있던 타일이 전부 교체되고...라고 길게 쓸 여유가 없다. 그냥, 다 갈아 엎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든 게 새거였다.
식사를 하던 아저씨들 중 한 명이 다가오시는데 깔끔한 차림에 단정한 말투가 우리가 알던 튀 아줌마 계열이 아니다. 그냥 숙소 보러 온 외국인들처럼 좀 봐도 되겠냐고 했더니 여기 저기 불을 켜고 안내해주는데, 아... 방은 더 충격적이었다. 모든 게 새 것일 뿐만 아니라 벽의 모든 구멍을 메우고 새로 칠해놨다. 벽 상단에 매달린 정상적인 에어컨이 감동이었고 삐까뻔쩍한 욕실은 5성급 호텔과 다름 없었다. 문도 다시 달았고 발코니로 연결되는 곳도 다 정비했다. 그야말로 어디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숙소였다.
우릴 안내해주던 아저씨의 존재도 참으로 신선했다. 우리가 살던 시기에는 숙소 관리인이 정상적이었던 때가 없었다. 뻔 아줌마가 사이공으로 내뺀 이후 숙소를 관리했던 튀 아줌마 조카 사위는 처음엔 순해 보이더니 술쳐먹고 현관문을 때려부시는 만행을 저질렀...... (한밤의 적막을 깨고 와장창 소리가 났을 때 그 놀람과 불안함이라니) 조카 사위가 나가고 한동안은 관리자 없이 이 넓은 건물에 오직 우리 셋 말고는 아무도 없게 되어 그건 그거대로 또 불안했다. 추워질 무렵부터 숙소를 관리했던 아저씨들은 착하긴 했는데 장사하러 온 타지 사람들이라, 숙소 마당이 술집이 되어버려 귀가할 때마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 시골의 외국인에게 과한 호기심을 보이는 술취한 청년들을 무시하고 현관까지 자전거로 냅다 달려야 했으니까. 근데 이 멀끔한 아저씨는... 누구신가요?
전에 살았네 어쩌네 말했다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그냥 방 보러 온 것처럼 이것 저것 물었는데 아직 오픈도 안 한 모양이었다. 명함도 아직 준비되지 않아 갖고 있던 수첩에 적어달라고 했는데 숙소 이름에 UBND, 그러니까 인민위원회가 빠졌다. 이건 또 무슨 사태지. 튀 아줌마가 빠진 건 알겠는데 인민위원회가 권한을 넘겼다는 건가. 아, 실은 동네 정보망(?)을 통해 동하의 어떤 알부자가 이 숙소를 넘겨받아 본격 투자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관리권한과 수익이 개인한테 갈지언정 실소유에서 인민위원회가 빠지긴 힘든데... 뭐지... 궁금하긴 했지만 이때 통역 동생도 없었고 나중에 다른 루트가 있겠지 싶어 더 파고들진 않았다. 우리가 떠날 때쯤 인민위 주석이 바뀌더니 노동청은 재활센터를 내놓고.. 이야,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 아저씨 직위는 부사장이라고 쓰여 있다. 사장이 주석일리는 없다.
어쨌든 가격도 2인실 방 하나당 25만동 선이다. 매우 괜찮은 가격. 참고로 동하에 더 싼 숙소도 있긴 한데 시골이다보니 공급이 적어 숙소든 공산품이든 오토바이 렌트든.. 오히려 싸지 않은 것들이 있다. 꽝찌에서 동하나 끄어비엣 리조트가 아닌 여린에 누가 묵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오게 된다면 꽤 괜찮은 선택이다.
참고로 이번에 묵었던 숙소는 1번 국도에 있는 꽝록이라는 여관으로, 예전엔 나름 퀄리티에 뿌듯해 하며 여린에서 머무는 한국 손님들을 전부 여기로 안내했었다(거기다 이집 주인 부부가 바로 옆에 자재상도 하고 있어 가정개선 할 때 시멘트, 모래, 페인트 등 모든 재료를 여기서 구입했다). 근데 이번에 가보니 워낙 구린 곳에 살던 우리가 숙소 기준이 확실히 낮았던 듯. 화장실 문고리 부분에 뚫린 직경 20센티 구멍이나 70년대 한국으로 돌아간 듯한 담요가 그리운 사람이라면 가도 좋다. 물론 우린 이번에도 즐겁게 묵었다.
로비. 붉은 테이블보 위의 우아한 찻잔봐라... 기둥도! 천정도! 조명도! 커튼도! 벽도! 바닥도! 이게 아니었어!!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쓰레기 태우는 곳이 있어 언제나 지저분했다.
왼쪽 위에 살짝 보이는 게 리셉션의 조명. 오마이.... 멋지구리한 리셉션 전체 사진은 없다.
일 마치고 터벅터벅 올라가던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계단은 더이상 없다.
이 복도 벽과 천정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거미줄이나 조명에 가득하던 벌레들은 둘째치고, 스콜이 뿌리면 옥상에서부터 내려온 물로 복도가 물바다가 됐었다. 곳곳이 금가고 깨진 타일 바닥은 각종 벌레와 먼지가 껴있었고, 뻔 아줌마가 청소를 해도 걸레 자체가 오래 되어 오히려 청소를 안하는 게 깨끗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다 옛날 얘기.
저 에어컨이 왜 신기해 보이는지는 예전 사진을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침대봐라.. 바닥 타일봐라......
............
식당으로 이어지는 복도마저 전부 새로 했다. 고급 건물에 온 느낌.
이곳이 바로 여린현 게스트 하우스!
- 2014/10/05 22:08
- thereiwas.egloos.com/1201169
- 덧글수 : 2


덧글
유리 2014/11/14 00:20 # 삭제 답글
만물상 2015/03/11 17: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