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좀 우울한 얘기만 써댄 것 같아서 오늘은 먹는 얘기.
사실 난 음식에 대한 집착이 좀 없는 편이라, 맛집을 찾아 굳이 줄 서서 먹거나 정말 맛있는 걸 먹었다고 다시 먹고 싶어 하거나 그런 게 없다. 외국에서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근데 베트남 음식, 특히 꽝찌에서 먹었던 음식은 정말이지...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고통이 이렇게 크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물론 음식 자체를 먹고 싶다기보단 그걸 먹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임을 알고 있지만. 어쨌든 이전에 음료 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음식에 대해 다 알지도 못하고 그나마 아는 것도 제대로 연구(?)한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체득형이다 보니 매우 주관적이다.
가기 전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쌀국수 많이 먹겠네", 갔다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쌀국수 많이 먹었어?"였던 걸 보면 역시 베트남 하면 쌀국수인 모양이다. 그래서 첫 순서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이자 모두들 떠올리는 쌀국수. 좀 아는 사람들은 퍼라고도 한다. 포호아, 포베이, 포메인... 한국의 베트남 음식점 체인마다 붙는 그 포다. 정식표기는 Pho로 영어의 F발음에 가깝다.
하지만 쌀국수가 퍼라고 생각하면 오산인 것이, 퍼는 면의 일종이다. 파스타가 면에 따라 스파게티, 펜네, 링귀니 등으로 나눠지는 것과 같다. 대강 내 경험에 비춰 면의 형태에 따라 소면과 비슷한 분, 칼국수와 비슷한 퍼, 우동과 비슷한 짜우로 나뉘는데 이게 또 지역마다 다르다. 꽝찌 바로 위 꽝빈만 가도 퍼는 꽝찌보다 얇고 짜우는 꽝찌보다 가늘다.
이 면에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종류와 이름이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분의 경우 분보는 쇠고기, 분져는 돼지고기, 분헨은 조개, 분맘넴은 젓갈소스, 분짜는 피쉬볼. 근데 여기서 다시 헷갈리는 게, 꽝찌의 분짜는 분짜까의 줄임말로 피쉬볼이 든 국수지만 하노이의 분짜는 구운 고기와 야채와 함께 분을 국물에 담가 먹는 음식이다. 어쩌라고...... 이렇게 지방에 따라 같은 이름이어도 다른 음식이거나 같은 음식이어도 맛이 전혀 다르거나 하니, 내가 사는 지역부터 일단 섭렵하는 게 정답.
■■■ 퍼 PHO

뒤에 들어가는 것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고 하지만 꽝찌에서는 퍼보(pho bo, 소고기)와 퍼가(pho ga, 닭고기) 밖에 못 봤다. 전혀 다른 음식으로 보이는 사진은 두 장 다 퍼보다. 왼쪽은 여린시장, 오른쪽은 동하시장(꿉마트 옆의 가장 큰 시장 말고 내가 살던 동네에 있던 작은 시장)의 내 단골집. 국물부터 확연히 다르고 들어가는 재료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소고기의 부위도 다른데 이건 같은 집이라도 그날 뭐가 있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패쓰. 생각해보니 퍼가는 시장에서 파는 걸 본 적이 없고 밤늦게 여는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술먹고 주로 먹었다. 한국의 베트남 식당에서 파는 인스턴트면과 달리(대부분 태국면이다) 꽝찌 오리지날 퍼는 납작하고 부드러운 생면이다.
■■■ 분 BUN

사진의 왼쪽은 여린의 한 식당의 분져(bun gio, 돼지고기), 오른쪽은 여린시장 단골집의 분짜(bun cha, 피쉬볼). 가장 많이 파는 게 분보(bun bo, 소고기)인데 사진이 없다. 취향상 퍼가 맞아서 분은 별로 안 먹었거든. 근데 언젠가 통역직원이 해준 얘기로는 자기 어릴 때만 해도(지금도 어리긴 한데) 분에 비해 퍼는 좀 비싸서 아플 때나 먹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분을 만드는 게 더 쉬운 걸까?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분이나 퍼나 가격에 차이는 없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꽝찌 사람들은 분을 주로 먹는다.
■■■ 분팃능 BUN THIT NUONG

분을 별로 안 먹었다고 한 건 분보처럼 국물이 있는 국수의 형태를 말한 거고, 퍼 못지 않게 중점적으로 먹었던 분도 있다. 바로 중부 지방 음식인 분팃능. 팃능은 구운 고기라는 뜻으로 분, 야채, 구운 돼지고기, 땅콩, 이것 저것 넣고 소스에 비벼 먹는 국수다. 이 소스가 단순한 땅콩소스도 아니고 느억맘이나 맘넴 같은 동남아향 가득한 소스도 아니고.. 진짜 맛있다. 분팃능은 소스가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당연히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심층적 조사에 따르면 여린의 주요 분팃능 맛집은 세 군데가 있는데 그 중 내 입맛에 가장 맞았던 건 사진에 있는 오후시장의 분팃능이었다. 오후시장이라는 게 뭐냐면 새벽부터 8시 정도까지 피크인 아침시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서너시 전후로 열리는 시장이다. 아침시장보다 규모도 작고 품목도 다른데 보통 식사보단 간식 개념으로 먹는다. 한 5시만 되도 분이 떨어지든 고기가 떨어지든 재료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춰야 하는 게 관건.
■■■ 짜우 CHAO

죽을 뜻하는 짜우와 철자는 같지만 두꺼운 면으로 만든 국수. 보통 짜우까(chao ca, 생선)나 짜우빗(chao vit, 오리고기)으로 통한다. 짜우빗은 시장에 많고 짜우까는 식당에서 주로 파는데, 밀가루도 있고 쌀가루도 있고 반깐 만드는 그 쫄깃하고 투명한 면도 있고 섞은 것도 있고 그렇다. 한 베트남 분의 말에 의하면 짜우는 보통 중부에서 많이 먹고 꽝찌가 가장 유명하단다. 짜우의 변형된 형태가 반깐이라는데, 사실 직접 보면 전혀 다른 음식이긴 하지만 면 요리임에도 젓가락이 아닌 숟가락으로 먹는 거나 테이블에 놓인 메추리알, 햄 등을 넣는 게 똑같다. 짜우빗은 느끼해서 잘 안 먹었고 먹더라도 고기 빼고 국물과 면만 달라고 하니까 항상 아줌마들이 신기해 했다.
사진은 동하 고용지원센터 근처의 짜우까 맛집. 보기와 달리 엄청 매운 집인데 내가 가면 아줌마가 눈인사를 하며 당연히 안 맵게 해준다. 단골의 위엄. 근데 양이 적지도 않은 이 짜우까가 아침은 몰라도 점심이나 저녁식사의 개념은 아닌 것 같은 게, 센터 동료들은 항상 술자리 마무리로 먹었고 이 집도 밤 늦은 시간이 확실히 더 붐빈다. 한 번은 5시에 수업 끝나고 동료와 와서 먹었는데 다 먹을 즈음 나한테 "선생님 오늘 저녁밥 뭐 드실 거예요?" 하는 거다. 아니 이게 저녁이지 뭔 소리냐 했더니 "이건 저녁이 아니라 간식이죠~"라는 대답.
바다가 지척이어도 해산물이 비싼 꽝찌에서는 짜우빗보다 짜우까가 비싼 음식의 느낌이다. 뭐 그렇다고 이런 식당의 짜우까가 비싸진 않지만 헉 소리 날 정도로 비싼 짜우까도 있다. 정부 관계자들의 초대로 몇 번 갔던 식당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 가격의 짜우까가 존재한단 말인가'의 감각. 대신 비싼 값을 해서, 내 단골집의 짜우까가 믹스커피라면 이 비싼 짜우까는 단연 TOP였다. 수타면의 질감, 통통하고 식감 좋은 생선, 깊이 우러난 국물... 정신을 놓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는 걸 알고 우리 드라이버였던 띠엔 아저씨가 이곳 저곳 짜우 맛집을 데려다 줬었고, 꽝찌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먹은 것도 짜우까였다. 여러모로 좀 애틋한 음식.
■■■ 미꽝 MI QUANG

미꽝은 유명한 다낭 요리인데 내 입맛엔 동하 미꽝이 훨씬 맞았다. 뭐 다낭이냐 동하냐가 아니라 식당의 차이겠지만, '다낭보다 동하에서 먹는 미꽝이 맛있어'라는 말에 다낭 애들이 어찌나 흥분하던지. 사진의 미꽝은 다른 집인데 둘 다 고용지원센터 근처에 있다. 물론 둘 다 엄청 맛있다. 왼쪽 집은 아줌마 아들이 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인데 잡지에도 실리고 티비에 나온 적도 있다. 처음엔 아줌마가 자랑해서 알게 됐고 나중에 아들을 직접 만나보니 자기 자랑을 참으로 자연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결혼한 아들내외가 들어와 산다고 한동안 공사를 했는데 나중에 구경해보니 베트남 가정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디 갤러리 같은 구조에 센스 넘치는 소품, 여기 저기 설치된 조각들과 그림들.. 확실히 예술가 집이 다르긴 하더라. 한국이나 여기나 예술 시키는 집안은 돈이 좀 있구나 생각했다. 오른쪽 집은 금슬 좋은 젊은 부부가 하는데 별다른 정보가 없다. 센터 코앞에 있어서 몇 번 갔는데 내가 외국인인 걸 알고도 데면데면, 관심도 없고 그냥 국수나 팔면 되지 하는 분위기. 특히 애 아빠는 갓난애기 들여다보느라 손님한테 신경도 안쓴다. 그게 또 마음에 들어서 자주 갔다.
미꽝이 아니라 식당 얘기만 줄창 했는데.. 사실 보기만 해도 설명이 필요 없지 않나? 고기, 야채, 새우, 계란, 뻥튀기 같은 것, 이것 저것 넣고 자작하게 비벼 먹는 국수다. 진짜 맛있고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같이 있던 치료사와 우리끼리 항상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내가 너무 보수적이고 치료사가 너무 진보적이라는 것. 한번 마음에 들면 특별한 사단이 나지 않는 한 매번 같은 것만 먹는 나와, 항상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식당을 뚫는 치료사를 대비시켜 표현한 말이다. 먹는 것에 딱히 도전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사실 식당 말고 슈퍼도, 생필품 가게도, 과일가게도, 카페도, 난 항상 가던 곳만 갔다. 처음 가는 집에선 대번 내가 외국인인 걸 들키고 그럼 녹음기마냥 같은 얘기를 읊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이 싫은 게 아니라 때론 좀 피곤하기도 하고.. 뭣보다 이방인의 생활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단골'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내가 뭘 먹는지 알고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주는 그 느낌 때문에 보수적 행보를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생긴 단골집 주인들이 참 그리운데 맨날 가서 먹기만 했지 일일이 사진을 찍지 않아 아쉽다. 그나마 남아 있는 두 장 중 왼쪽은 동하 센터 옆 작은 시장의 퍼집 아줌마, 오른쪽은 여린 시장 아줌마. 동하 아줌마네는 시장이 작아서 그런가 퍼를 파는 곳이 여기뿐이라 단골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중간에 천장 공사한다고 잠깐 멈추더니 나중에 짜우빗으로 바뀌었다. 여린 아줌마는 정말 쾌활하고 귀여우시다. 원래 여린 시장에서 몇 개월 정도 아침을 먹은 진짜 맛있는 집이 있었는데 주인 아줌마가 애를 가져서 다른 아줌마한테 넘긴 뒤로 맛이 변했다. 그래서 이 아줌마네로 옮겼는데, 알고 보니 '저 외국인이 언제쯤에나 내 국수를 맛보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셨던 것. 마지막 퍼도 여기서 먹었는데 얼마나 섭섭해 하시던지... 다들, 잘 지내고 계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뜬금없지만 식당 한 곳 추천하며 마무리. 한국에서 보는 베트남 식당들은 대부분 베트남+태국이 짬뽕된 요상한 동남아식인 경우가 많다. 평택이나 안산 등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은 곳에는 진짜 베트남 식당이 좀 있지만 서울에서는 찾기가 힘든데, 서울 한복판에서 진짜 베트남 음식을 파는 곳이 있다.

이런 비쥬얼. 완벽하다. 하노이식이라 좀 아쉽지만(하긴 중부음식 파는 곳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꽝찌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하노이고, 사실 진짜배기를 먹을 수 있다면 북부고 남부고 무슨 상관. 분짜, 분보남보 등 하노이에서만 먹을 수 있는 요리들이 있다. 물론 나는 항상 국수에는 고수, 소스에는 느억맘을 추가해서 팍팍 넣어먹지만 어쨌든 현지에 가까운 맛을 내는 곳이다. 이름은 참으로 소박하게도 <베트남 식당>, 직원 모두 베트남 사람. 위치는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쭉 올라오다가 첫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비탈길을 따라 전광수 카페를 지나 올라가다 보면, 1층에 비스트로인지 펍인지 시끄러운 가게가 있고 그 위 2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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